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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한국 단편 – 이태준

2015-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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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한국 단편, 오늘 만나볼 작가는 상허 이태준입니다. 이태준은 ‘우리 근대소설의 완성자’ 또는 ‘단편 문학의 명수’, ‘한국의 모파상’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는데요. 소설 외에도 글쓰기 교본 《문장강화》로 유명하죠. 아마 글공부를 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이 책을 거치셨을 겁니다.

그러면 이태준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한번 살펴볼까요?


그림 1. 이태준

이태준은 1904년 철원의 지식층 집안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개화당에 가담해 구한말 개혁파 운동에 참가했는데요. 수구파에 밀려 실패하고 말죠. 그래서 가족을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태준이 다섯 살 되던 해, 화병으로 사망하고 맙니다. 곧이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이태준은 두 누이와 철원의 친척 집에 맡겨집니다. 이후 친척 집을 전전하며 생활하던 그는 주위의 동정에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매우 반항적인 아이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어른들의 구박 때문에 어린 나이에 가출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이런 환경 때문에 그는 어렵게 공부 했다고 합니다. 1920년 배재학당 입학시험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다니지 못했고, 다음 해 휘문고보에 입학하기까지 낮에 일하고 밤에는 청년회관 야학과에서 공부했다고 하네요. 휘문고보를 다니면서도 교내 청소를 맡아 하며 학비를 면제받고, 책을 팔면서 수업료를 조달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주경야독’의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틈만 나면 책을 읽었습니다. 톨스토이며 괴테, 빅토르 위고 등의 작품을 탐독했는데요. 휘문고보 재학 시절 학예부장을 맡으며 학예지에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동맹휴교 주모자로 찍혀 4학년 때 퇴학을 당합니다. 이후 일본에 건너가 신문 배달이나 우유 배달 등을 하며 상지대학을 다닙니다. 이때 단편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해 등단하게 되죠. 하지만 ‘조선문단’이 아닌 시대일보에 글이 실렸는데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그림 2. 김복진이 그린 이태준 소묘

이후 이태준은 중앙일보 기자로 일하면서 이상을 만났는데요. 그는 이상의 천재성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상에게 시를 쓸 것을 권유하죠. 그리고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에게 부탁해 그의 시를 신문에 실을 수 있도록 합니다. 이 작품이 바로 <오감도>입니다. 그러나 난해하다는 이유로 독자들의 비난을 받아 연재가 중단되고 말았죠.


그림 3. 이상, 중앙일보에 연재된 <오감도>

이태준 또한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1940년대에 친일활동을 합니다. 친일 색채가 강한 글을 쓰는가 하면 조선문인협회와 황군위문작가단 같은 친일 단체에 협력하기도 하죠. 또 일제가 주는 ‘조선 예술상’을 받기도 했고요. 이후 그는 해방되기까지 철원에서 칩거합니다.

해방 뒤 이태준은 갑자기 사회주의자로 급변합니다. 이전의 그가 사회주의 문학과는 전혀 다른 문학을 하고 있었던 걸 감안하면, 당시 그의 급변을 두고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이때 그는 좌익 문학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해방 전후>를 발표합니다. 이 작품은 그가 좌파 이념을 선택하게 된 이야기들을 담고 있죠. ‘한 작가의 수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친일에 대한 자아비판, 친일을 택한 자신의 소극적 처세에 대한 자책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갑자기 사회주의자가 된 것을 두고, 지난날 소극적이고 무기력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 때문이라 짐작합니다.

“해방 전엔 내 친구가 대부분이 소극적인 처세가였습니다. 해방 후에도 의연히 처세만 하고 일하지 않는 덴 반댑니다.”

이 대목만 보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림 4. <해방 전후>(1947)

당시 많은 사회주의 작가들이 월북을 했는데요. 이태준 또한 1948년에 월북합니다. 그곳에서 조선문학건설본부 중앙위원장을 맡기도 하고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을 맡기도 하는데요. 평양조선문화협회 방문사절단 1호로 소련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그림 5. 월북 직후로 추정되는 이태준 사진

하지만 곧 소외를 당합니다. 카프의 선봉이었던 한설야가 카프와 반대 성향이었던 구인회에서 활동한 이태준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설야는 소련파의 지원을 받으며 편안하게 사는 이태준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친일적인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쫓겨나 함흥에서 노동자의 생활을 하게 되죠. 그러던 중 1964년 중앙당 문화부 창작 1실 전속작가로 복귀합니다. 하지만 김일성을 영웅화하라는 당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지방으로 쫓겨나 결국 숙청당하였고 그의 자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고 합니다. 남한에서 체포되어 장기수로 살아남은 김진계의 말에 따르면 이태준은 66세인 1969년까지는 살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 죽었는지 등 그 이후는 아직도 알 길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림 6. 이태준


그림 7. 이태준 가족 사진

참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이라 안타까운데요. 그는 1930년대 후반 해방과 전쟁, 냉전으로 점철된 혹독한 시대를 살면서 중, 단편 60여 편과 장편소설 13편을 발표했습니다.

“독자나 비평가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작가의 기질에 맞는 형식으로 아름다운 것을 지어낼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은 사상이라기보다 차라리 감정이기를 주장해야 할 것이 철학이 아니라 예술인 이유다. 평론가는 개념보다는 감성에 천재이기를 바란다.”

- 무서록, 이태준, 종합출판범우, 2010

이태준은 글을 통해 자신의 문학관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이러한 문학관을 가진 그가 사상을 급선회해 사회주의자가 되고 월북을 한 뒤 사상성 짙은 글을 쓰도록 강요당했다는 것에서부터 그의 월북 이후 삶을 추측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지난날에 대한 반성으로 선택한 일이었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다시 그의 작품 이야기도 돌아가 보자면, 그의 이러한 문학관은 그가 활동한 구인회와도 연결이 됩니다. 앞서 카프와 반대 성향의 단체라고 언급했었죠.

구인회는 1933년 결성된 문학 친목 단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기림, 이효석, 이종명, 김유영, 유치진, 조용만, 이태준, 정지용, 이무영 이렇게 9명이 결성했죠. 이후 이종명, 김유영, 이효석이 탈퇴하고 박태원, 이상, 박팔양이 가입합니다. 여기서 다시 유치진, 조용만이 탈퇴를 하고 김유정, 김환태가 가입했습니다. 어쨌든 회원 수는 9명을 유지했죠.

구인회는 월 2~3회의 모임과 서너 번의 문학 강연 활동을 했고 기관지를 한 번 발행했습니다. 그리고 약 4년 만에 해체되었죠. 그렇기 때문에 그 활동 기간과 내용이 크게 두드러질 것은 없지만, 문단의 대세였던 카프가 해체되면서 생긴 공백을 구인회가 메웠습니다. 그러니 구인회는 당대 문학의 주류였던 셈입니다.


그림 8. 구인회 기관지 <시와 소설>

구인회는 카프 문학, 사회주의 문학이 치중했던 이념을 배제하고 문학 자체의 자율성과 기교, 미학을 강조한 단체였습니다. 새로운 감각과 기교를 자랑했던 이 단체의 성격을 모더니즘이라고 하는데요. 이태준은 구인회 활동 기간 동안 자신의 대표작들을 발표합니다. <촌뜨기>, <손거부>, 그리고 오늘 같이 살펴볼 <달밤> 등입니다.

구인회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문단의 주류였습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구인회 작가들 대부분은 절필하는데요. 이는 아마 구인회가 추구하는 예술의 지향점이 복잡한 시대에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구인회의 성격에서 알 수 있듯 이태준의 작품 역시 뛰어난 기교와 구성을 자랑합니다. 세련된 묘사와 인물 창조로 ‘단편 문학의 명수’ 또는 ‘단편소설의 묘미를 보여준 작가’, ‘근대적인 단편소설의 한 완성자’로 통합니다. 최재서는 자신의 글 <단편 작가로서의 이태준>(1937)을 통해 이태준의 매력을 “바로 선명한 인간상을 묘출해내는 수완과 그런 인물들의 극히 평범한 생활 가운데 흐르고 있는 유머와 페이소스를 포착하는 수법”이라고 밝혔습니다.

당시 “시에는 지용(정지용), 문장에는 태준(상허의 산문, 지용의 운문)”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문장 역시 탁월했습니다. 우리말을 고르고 골라 문장을 완성해,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통했죠. 그의 이러한 문장과 글쓰기에 대한 방법은 그의 저서 《문장강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1933년 발표된 그의 단편 <달밤>을 통해 그의 문학을 살펴보도록 하죠.


그림 9. <달밤>

주인공 ‘나’는 성북동에 이사 와 황 수건이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황 수건은 조금 모자라지만 순박한 사람으로 아내와 함께 형의 집에 얹혀살죠. 정식 배달원이 되는 게 소원인 보조 신문 배달원 황 수건은 매일 주인공 ‘나’에게 신문을 전해주고, 함께 담소를 나눕니다. 어느 날 내일부터 자신이 정식배달원이 될 것이라며 자랑을 하고 돌아가지만, ‘똑똑치 못하다’는 이유로 보조 배달원 자리마저 잃게 됩니다. 이에 ‘나’는 참외장사라도 해보라고 돈을 건네지만, 장사는 망하고 그의 아내도 도망가 버립니다. 이후 오랜만에 찾아온 황 수건은 내게 훔친 포도를 선물하는데요. 결국, 그 값을 ‘나’가 지불하게 되죠. 이후 주인공 ‘나’는 달밤 아래 그가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림 10. 실제 성북동에 위치한 이태준 가옥(현 전통찻집 ‘수연산방’)

주인공 ‘나’가 관찰하는 황 수건은 바보라고 할 수 있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황 수건의 외모 또한 그를 비루하게 느끼게 합니다.

하 말이 황당스러 유심히 그의 생김을 내다보니 눈에 얼른 두드러지는 것이 빡빡 깎은 머리로되 보통 크다는 정도 이상으로 골이 크다. 그런데다 옆으로 보니 짱구대가리다.
(…중략…) 손과 팔목은 머리에 비기어 반비례로 작고 가느다랗다.

하지만 순박하고 우직한 사람이기도 하죠.

하루는 나는 평생소원이 무엇이냐? 라고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그까짓 것쯤 얼른 대답하기는 누워서 떡 먹기”라고 하면서 평생소원은 자기도 원배달이 한번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남이 혼자 배달하기 힘들어서 한 이십 부 떼어주는 것을 배달하고 월급이라고 원배달에게서 한 삼 원을 받는 터이라, 월급을 이십여 원을 받고 신문사 옷을 입고 방울을 차고 다니는 원배달이 제일 부럽노라 하였다. 그리고 방울만 차면 자기도 뛰어다니며 빨리 돌릴 뿐 아니라 그 은행소에 다니는 집 개도 조금도 무서울 것이 없겠노라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럴 것 없이 아주 신문사 사장쯤 되었으면 원배달도 바랄 것 없고 그 은행소에 다니는 집 개도 상관할 바 없지 않겠느냐” 한즉 그는 뚱그레지는 눈알을 한참 굴리며 생각하더니 “딴은 그렇겠다”고 하면서, 자기는 경난이 없어 거기까지는 바랄 생각도 못하였다고 무릎을 치듯 가슴을 쳤다.

그의 순박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인데요. ‘나’ 외에는 이런 황 수건을 모두 무시합니다.

한데 황 수건은 그의 말대로 노랑수건이라면 온 동네에서 유명은 하였다. 노랑수건 하면 누구나 성북동에서 오래 산 사람이면 먼저 웃고 대답하는 것을 나는 차츰 알았다.


그림 11. 황 수건 삽화

이런 황 수건을 지식인인 주인공 ‘나’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황 수건과 대화를 나누고 그에게 장사 밑천을 주기도 하는 등 그에게 연민과 정을 느끼죠. 이는 주인공이 황 수건을 시골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 몇 마디 사귀지 않아서 곧 못난이란 것이 드러났다. 이 못난이는 성북동의 산들보다, 물들보다, 조그만 지름길들보다, 더 나에게 성북동이 시골이란 느낌을 풍겨주었다.
서울이라고 못난이가 없을 리야 없겠지만 대처에서는 못난이들이 거리에 나와 행세를 하지 못하고, 시골에선 아무리 못난이라도 마음 놓고 나와 다니는 때문인지, 못난이는 시골에만 있는 것처럼 흔히 시골에서 잘 눈에 뜨인다. 그리고 또 흔히 그는 태고 때 사람처럼 그 우둔하면서도 천진스런 눈을 가지고, 자기 동리에 처음 들어서는 손에게 가장 순박한 시골의 정취를 돋아주는 것이다.

이처럼 황 수건, 못난이는 주인공이 새로 이사 간 낯선 동네에서 시골의 정취와 정겨움을 느끼게 해주는 인물입니다. 이를 통해 이태준은 도시에서 사라진 못난이들을 아쉬워합니다. 다시 말하면 못난이로 대변되는 시골스러움을 긍정하고, 못난이를 수용하는 시골스러운 삶을 옹호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못난이가 거리에 나와 행세할 수 없는, 즉 못난이를 수용하지 않는 도시적인 삶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기도 합니다.

시골스러움으로 대변되는 못난이들은 무능력하고 세상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 소외된 인물입니다. 황 수건은 주인공이 인정(人情)을 느낄 정도로 순진하죠. 하지만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무능력할 정도의 순진함과 순박함 때문에 보조 배달원 자리도 잃고 비극적인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주인공에게 정겨움을 주었던 황 수건의 순박함은 주인공에게는 시골의 정취를 주었지만, 그 자신에게는 고통을 안겨준 것입니다.

작가 이태원은 이 설정을 통해 각박한 세태, 인간의 따스한 정이 사라진 시대를 간접적으로 비판합니다. 시대에 도태되고 소외된 못난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며, 순박한 사람들이 살아가기 어려운 부조리한 사회를 그리고 있는 것이죠.


그림 12. 이중섭, 달밤

어제다. 문안에 들어갔다 늦어서 나오는데 불빛 없는 성북동 길 위에는 밝은 달빛이 깁을 깐 듯하였다.
그런데 포도원께를 올라오노라니까 누가 맑지도 못한 목청으로,
“사……께……와 나……미다까 다메이……끼……까……(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를 부르며 큰길이 좁다는 듯이 휘적거리며 내려왔다. 보니까 수건이 같았다. 나는,
“수건인가?”
하고 아는 체하려다 그가 나를 보면 무안해할 일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휙 길 아래로 내려서 나무 그늘에 몸을 감추었다.
그는 길은 보지도 않고 달만 쳐다보며, 노래는 그 이상은 외우지도 못하는 듯 첫 줄 한 줄만 되풀이하면서 전에는 복 적이 없었는데 담배를 다 퍽퍽 빨면서 지나갔다.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하였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황 수건의 답답한 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달빛이 깁(비단)을 깐 듯하게’ 아름다운 풍경이기도 하죠. 이태준은 이처럼 상황을 서술하지 않고 시각적으로 전달합니다. 황 수건의 마음은 분명 슬프고 암담하고 비극적인 기분일 겁니다. 그런 그는 처량하게 노래를 부르는데, 독자는 아름다운 장면과 이를 바라보는 화자의 애정 어린 시선을 느낍니다. 독자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 풍경은 아름답기 때문에 황 수건의 심정을 압도합니다. 독자는 그의 슬픔과 현실을 실제보다 덜 비극적으로 느낄 수도 있죠. 하지만 그렇기에 그의 비극이 더 비극이 되는 게 아닐까요?

이태준의 이러한 묘사는 서정시에 견주어지곤 합니다. 하지만 식민지 상황을 객관적으로 포착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지요. 그렇긴 해도, 앞서 살펴본 그의 문학관에 맞는 작품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단편 <달밤>은 이태준이 습작기를 벗어나 본격적인 그만의 특성을 보여준 시작점으로 평가됩니다. 그의 전반적인 소설의 특징을 다 갖추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고요. 그는 당시 사회주의 작가들이 가난한 삶을 처절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과 달리 살펴본 것처럼 소외 당하는 이들의 삶을 서정적일 정도로 따뜻한 시선을 담아 그려냈습니다. 이렇다 할 대단한 사건이나 전개도 없이, 말 그대로 일상 속 비루한 사람들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작품 특성이고 그의 작품 세계인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이 그를 두고 “현진건의 뒤를 이어 세련된 묘사와 인물 창조로 한국 단편소설의 예술적 완성도를 높였다”고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이태준(李泰俊, 1904~미상)
<까마귀>, <복덕방>, <패랑갱>, <농군>, <해방 전후> 외


자료출처

서적
  • 20세기 한국 소설, 창비, 2005
  • 무서록, 이태준, 종합출판범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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