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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한국 단편 – 이광수

201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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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 고등학교 시절 ‘필독 도서’ 혹은 ‘논술에 도움이 되는 책’이라는 명목으로 우리 문학을 접하게 됩니다. 대부분 문학 교과서에 실린 작품들이지요. 여러분은 우리 문학을 배우면서 재미있다고 느꼈나요? 그것이 왜 좋은 소설인지 체감하셨나요? 돌이켜보면 문학을 전공한 필자 역시, 당시에는 왜 그 작품들이 좋은 것인지 몰랐습니다. 주제, 몇 인칭 시점 이런 사항들을 주로 배우기도 했고, 소설 속 이야기들이 저는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또 방학이면 단편 소설을 읽고 내야 하는 독후감이 귀찮기도 했고요.

그래서 마련해보았습니다. 다시 읽는 한국 단편 시리즈를 말이죠. 우리 근대문학이 시작하는 시점의 단편소설을 작가의 일대기와 함께 살펴본다면, 조금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그때는 몰랐던 것들을 이번엔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단편소설이니 읽기도 쉽고, 시대순으로 읽어 내려가다 보면 우리 문학의 흐름도 파악해 볼 수 있을 테고요.


그림 1. 책 이미지

오늘은 춘원 이광수와 그의 단편 <무명>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이광수는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요. 세 형이 모두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맙니다. 이광수의 원래 이름은 보경이었는데요. 이는 그의 아버지가 꿈에 노승에게서 거울을 받고 그를 낳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하지만 후에 개명하게 되지요. 춘원의 아버지는 초시에 합격했지만 소과와 대과에 연속으로 실패한 후 술로 세월을 보냅니다. 그래서 그의 어린 시절은 꽤나 가난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가 뽕나무 잎을 도둑질해서 키웠다고 할 정도니까요. 이후 춘원은 11세에 콜레라로 부모를 잃게 되고, 담배장사를 시작으로 육체노동을 하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그는 폐렴과 결핵을 얻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치료할 비용이 없어 결국 치료할 시기를 놓치게 되지요. 그는 그래서 평생 병약했습니다. 육체노동에 시달리고 가난과 부모 잃은 설움에 어려운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이광수는 어려서부터 영특해서 5세에 천자문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소학>과 <명심보감>을 줄줄 읽었고, 외할머니께 책도 읽어드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학교에 다닐 돈이 없어 동네 글방에서 공부해야 했지요. 그의 문학적 재능은 이때부터 뛰어났던 모양입니다. 어린 시절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까지 하며 신동 소리를 들었다고 하니 말이에요.


그림 2. 17세 무렵의 이광수

이후 천도교 관련 일을 하다가 일본으로 유학을 가지만 학비 문제로 중퇴와 복학을 반복하는 등 어려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일본 타이세이 중학교를 다니며 유학 생활을 하던 중 그는 홍명희 등과 조선인 유학생 모임인 ‘소년회’를 조직하고 <소년>을 발행하면서 시와 소설, 논설 등을 발표하는데요. 이때 톨스토이와 니체, 헤겔, 다윈의 진화론 등을 접하게 됩니다.

성인이 된 이광수는 오산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아이들에게 니체와 톨스토이 등을 가르치는데요, 이 때문에 이광수 배척 운동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위험한 사상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는 이유였습니다. 결국 그는 잠시 학교를 떠나 만주와 상해, 시베리아 등 세계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오산학교에 복직하는데요. 춘원은 오산학교 교가를 직접 작사하기도 하고 김소월의 담임을 맡기도 했다는 군요.


그림 3. ‘소년’ 제1호

1910년 춘원은 중매로 백혜순과 결혼을 합니다. 이후 그는 사랑 없는 결혼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시간 낭비인지,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역설하고 다닙니다. 또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장편소설이자 연애 소설이며, 춘원의 출세작이기도 한 <무정>을 발표해 자유연애를 이야기합니다. 뿐만 아니라 칼럼을 통해 동성애를 옹호하기도 하죠. 이로 인해 젊은층에게는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중·장년층에게는 비난을 받았죠.

그런데 그 당시 동성애를 옹호했다고 하니 좀 놀랍지 않나요? 자유연애를 주창하고 동성애까지 옹호하는 걸 어르신들이 좋게 볼 리가 없을 것입니다. 역시나 유림은 <무정>의 신문 연재를 중단하라는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또 중추원 양반들은 ‘이광수란 어미 아비 없이 자란 상놈의 자식’이라며 연재 중단을 요청했고요. 성리학자들은 항의 규탄 집회까지 벌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청년층과 지식인층의 열렬한 지지로 그의 고료는 늘어났다고 하네요.


그림 4. 이광수, <무정>

그는 실제로 자유연애를 실천했습니다. 유부남이지만 일본 유학 시절 두 여인을 동시에 사귀거든요. 이걸 꼭 자유연애라고 말하기도 그렇지만, 의학도인 허영숙과 미술학도인 나혜석을 동시에 사귑니다. 춘원은 나혜석과 결혼하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끝내 결혼하지 못하죠. 나혜석의 오빠이자 이광수의 친구였던 나경석이 엄청나게 반대했기 때문인데요. 유부남에 양다리였으니, 어떤 오빠가 여동생을 그런 남자에게 시집 보낼까요? 내 동생이 시집간다고 우겨도 머리 박박 밀어서 못 만나게 하고 싶겠죠.

이 화려한 연애는 춘원과 허영숙의 결혼으로 끝이 납니다. 나혜석과 결혼하지 못해 당장 허영숙과 결혼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는 본 부인하고 합의 이혼하는데요. 춘원이 몹시 아플 때, 의사인 허영숙의 지극한 간호에 마음이 움직여 결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승자는 허영숙이 되는 걸까요? 어쨌거나 허영숙은 춘원을 정말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춘원의 이런 연애사와 앞선 세계 여행은 그의 단편 <어린 벗에게>에 어느 정도 드러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참고하고, 한 번 읽어보시면 좋겠네요.


그림 5. 나혜석(왼쪽)과 허영숙(오른쪽)

춘원은 허영숙과 결혼해 2남 2녀를 얻었습니다. 그 중 두 명은 요절했다고 하는군요. 춘원은 아이들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함께 노래 부르며 놀아주었다고 해요. 이광수가 허영숙과 부부싸움을 할 때면 아이들이 이광수 편을 들었다고 할 정도니까, 정말 좋은 아버지였던 것은 분명해 보이네요.

훗날, 그러니까 광복이 된 후 1949년, 이광수가 친일 행위로 반미특위의 조사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일인데요. 아들 이영근은 반민특위 위원장에게 아버지에 대한 보석 신청과 자신을 대신 수감해 달라는 혈서를 보냈다고 하네요. 이광수는 이후 병 때문에 출감되었다고 하는데, 아들의 혈서가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1946년 춘원은 허영숙과도 이혼합니다. 이 이혼을 두고 “이광수가 전범으로 걸려들 때를 걱정하여, 자식과 재산의 보호를 위해서 취하는 잇속 빠른 길”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허영숙은 후에 자녀들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납니다.


그림 6. 이광수의 가족사진(1937년)

춘원은 대표 친일파로 불립니다. 친일파 명단에 항상 포함되어 있죠.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친일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1911년 그는 전영택 등과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학회’를 조직합니다. 이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신할 것을 맹세하는데요. 손가락을 자르고 그 피를 받아 물에 타 마시기도 했습니다. 또 1919년 2·8 독립선언을 주도하기도 하죠. 심지어 2·8독립선언서를 직접 작성하기도 했는데요. 3·1운동에 참여한 후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을 발행합니다.

하지만 재정난으로 독립신문이 폐간되고 건강도 악화되면서 그는 점차 회의에 빠집니다. 결국 1921년 그는 귀국하는데요. 이때 검문으로 일본인 경찰에게 체포되었지만 곧 풀려나면서, 변절자라는 의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던 허영숙과 재혼하게 됩니다. 물론 허영숙의 지극한 간호로 춘원이 몇 번 위기를 넘긴 건 사실이지만, 독립운동을 하던 동료들은 그녀 때문에 춘원이 타락했다고 못마땅해 했다는 군요.

이후로는 친일행적들이 주를 이룹니다. 그는 ‘카야마 미쯔로오’로 창씨개명을 했는데요. 창씨개명을 옹호하고 합리화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죠.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그에게 돌과 인분, 쓰레기를 던졌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광복 소식을 듣고 충격 받기도 했습니다. 일제 식민지가 더 오래갈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친일에 대한 고백서를 쓰면서 그는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조선 사람들은 황국신민의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창씨개명 안 한 사람, 신사참배 안 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등 이야기했죠. 또 “일본 관헌이 작성한 3만 8천 명의 조선 지식인 살생부와 자신을 바꾸려 했다”고 항변하기도 하고요. 물론 그 살생부에 대한 증거는 없는 상황입니다.

그는 1950년 6·25전쟁 중 7월 12일 납북되는데요. 그 해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림 7. 일제 강점기 후반의 이광수

이제 그의 작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격조가 높다’고 평가 받는 단편 <무명>을 이야기해볼까 하는데요.


그림 8. 이광수, <무명>

주인공 ‘나’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이곳 감방, 특히나 아픈 사람들이 모여 있는 병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나’의 눈으로 적은 것입니다. 윤과 민, 정, 강과 나, 간병수가 닫힌 감옥 안, 좁은 감방 안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나’가 보는 시점이지요. ‘나’를 제외하고 윤과 민, 정, 강은 끊임없이 다툽니다. 일주일에 한번 나오는 멸치를 서로 먹으려고 싸우거나 음식을 누가 받느냐 등, 어찌 보면 하찮은 일들로 끊임없이 싸우는데요. 서로 욕하고 헐뜯고 싸워대지만, 그건 그저 싸움일 뿐입니다. 생산적이지도 않고 뚜렷한 결과도 없이 계속 지루하게 이어지는 싸움인 거죠. 여기서 이 소설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즉 감방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욕망, 탐욕과 이기심, 거짓말, 아첨 등을 그가 언어로 탁월하게 재현해낸 것입니다. 이 공간은 죽음과도 연결된, 그야말로 극적이고 폭력적인 공간인 것입니다.

똥통은 바로 민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데 볼 때마다 칠 아니한 관을 연상케 하였다.
(…중략…) 잠깐 기쁨으로 빛나던 얼굴이 다시 해골같이 되어서 나가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그는 이 공간과 이곳 사람들을 죽음과 관련해 묘사하는데요. 그렇다고 이 소설이 우중충하거나 우울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 중에 그들의 말투는 실감나고 재미 있거든요.

종교가 노릇을 이십년이나 했길래로 남 먹으라고 주는 음식에 침만 발러주었지, 십년만 했드면 코 발러줄 뻔했소그려?
윤은 소프라노로 정은 바리톤으로 코를 골아대면 나는 언제까지든지 눈을 뜨고 창을 통하여 보이는 하늘에 별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 9. 말년의 이광수(왼쪽)와 반미특위 수형 시절(오른쪽)

여기서 ‘나’인 작중화자는 끝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다른 인물들은 왜 수감되었는지 알 수 있지만 ‘나’에 대해서는 그런 것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나’를 제외한 이곳을 묘사하고 있는데요. ‘나’라는 인물은 이곳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게 고귀하고 모범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진상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죽어서 분명히 지옥으로 안 가고 극락세계로 가능기오?
(…중략…) 나는 생전에 이렇게 중대한, 이처럼 책임 무거운 질문을 받아본 일이 없었다.

이처럼 ‘나’는 ‘책임 무거운 질문’을 받을 정도로 이곳에서 인정받는 인물인 것이지요. 또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고, 질문할 수 있는 현명하고 유식한 사람인 것이고요. 이처럼 감옥 안의 생활을 바라보는 ‘나’는 다름 아닌 작가 이광수일 것입니다.

이 소설은 1937년, ‘인격수양과 민족문화 건설’을 위해 조직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일을 적은 것인데요. 춘원 작품들의 특징이 계몽주의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작중 화자 ‘나’는 ‘바라본다’라기 보다는 ‘굽어본다’라는 표현에 가깝습니다.

이 작품도 물론 계몽주의 성격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긴 하지만, 다른 작품들처럼 계몽주의 색채가 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가르쳐야 하고 베풀어야 한다는 자세에서 비롯된 그의 작품들하고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겠죠. 이 작품도 굽어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순 없지만, 다른 작품에 비해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감방 안의 모습을 생생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소설의 가치이고, 가장 격조 있다고 판단되는 지점일 것입니다.


그림 10. 이광수 전집, 삼중당, 1976

노긋노긋한 흰밥.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고마운 것인 줄은 감옥에 들어와본 사람이라야 알 것이다. 밥의 하얀빛, 그 향기, 젓갈로 집고 입에 넣어 씹을 때의 그 촉각, 그 맛, 이것은 천지간에 있는 모든 물건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라고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쌀밥, 이러한 말까지도 신기한, 거룩한 음향을 가진 것같이 느껴졌다. 이렇게 밥의 고마움을 느낄 때에 합장하고 하늘을 우러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밥의 즐거움을 골고루 받게 하소서!’ 하고 빌지 아니할 사람이 있을까?


자료출처

서적

무명-다시읽는 한국문학, 이광수, 유페이퍼,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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